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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 백범 김구선생님, 유관순 열사, 윤봉길의사

happy-ssaem 2022. 8. 4.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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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이란?

광복절은 우리나라가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에서 벗어나 독립한 날과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날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날이며 우리나라 5대 국경일의 하나로 1949년에 제정되었다.

 

광복절 8월15일 국경일
조국 광복을 한영하는 인파 (천재교욱)

 

선조들은 주권을 다시 찾기 위해 무장 투쟁을 벌이는 등 끊임없이 힘 썼으며 1919년 3월 1일에는 서울에 있는 탑골 공원에서 기미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만세 운동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일본은 평화적인 만세 운동을 총칼로 진압하였다.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해외로 옮긴 선조들은 중국의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세우고, 광복군을 조직하는 등 더욱 조직적으로 독립 운동을 벌였으며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식민 통치를 더욱 강화하였다.

 

광복절 8월15일 국경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 (천재교육)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여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았으며 곧바로 우리나라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오고, 38선을 경계로 국토가 분단되는 등 시련을 겪었으나,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여 번영의 기틀을 다졌다.

 

광복절 독립운동가

1. 백범 김구 (1876. 8. 29 ~ 1949. 6. 26 - 황해도 해주 출생)

내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요 

 

 

광복절 독립운동가 - 백범 김구광복절 8월15일 - 백법 김구선생님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도가 중에서도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으며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부장, 재무장, 근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광복 이후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2. 유관순 열사 (1902. 12. 16 ~ 1920.9. 28 - 충남 목천군 출생)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 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광복절 - 유관순 열사

 

https://youtu.be/IklbsjwyYr8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1919년 3.1운동이 시작되었으며 교장 룰루프라이는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참가를 말렸지만, 학생들은 학당의 담을 뒤어넘어 참가했다. 이 여파로 1919년 3월 10일에 전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자 함께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고얗인 천안으로 내려와 마네 운동에 참여했는데, 3.1운동 중 천안 아우내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이 때 유관순 열사는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 의해 체포됭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간다.

 

그러나 만세 운동 중 유관순의 부모가 일본 경찰에게 살해당하고 유관순도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을 구형 받는다. 이는 재판을 바았던 당시 "다시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 하는 재판장의 질문에 유관순은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졌다. 이에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역 5년형이라는 중형이 내려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법에 다른 정상적인 형량이 아니었고, 이에 유관순 여사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항소하여 복심법원에서 3년형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수감된 뒤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후 1920년 4월 동경 이왕세자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의 결혼 기념 특사로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유관순은 결국 1920년9월28일에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향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옥사하였다. 얼마나 고문이 참옥했던지 이화학당에서 시신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을 당시 서대문형무송에서 거부할 지경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이화학당 교장 룰루 프라이는 유관순의 시신을 인도 받아 장례를 치러 주었다.

 

3. 윤봉길 의사 (1908. 6. 21 ~ 1932. 12. 19 - 충남 덕산군 출생)

 

광복절 - 윤봉길 의사

 

https://youtu.be/DRNNvcLmg0g

 

11살 때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 입학 했으나 일본어를 배운다는 것과 일본인 교사 휘하에서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에 불만이 많았고 결정적으로 이듬해 3월 초, 3.1운동을 보고 더 일본이늘 증오하게 되었는데 그 길로 학교 그만두겠다고 부모님게게 폭탄선언을 하고 자퇴하였다. 그 대신 한학을 배웠으며 학교를 다니던 도중에는 한 번은 일본인 교사 아래에서 일본어 기초를 배우던 도중에 동급생에게 팩트폭력을 한 전력이 있다. 

 

윤봉길은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만주 등의 지역에서 갖가지 사회 활동을 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 한인 애국단에 소속되었다. 칭다오에서 일본인 부부가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일하며 때를 기다렸으나 만주사변 이후 윤봉길은 "죽을 자리가 없어졌다."라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서 김구와 만났다. 이때 "이봉창 의사와 같은 일로 써 달라"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윤봉길은 조국을 떠나며 "장부출가생불환"이라고 말하였다.

 

광복절 - 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의 처형을 준비하는 사진 - 나무위키

 

거사 후 윤봉길은 그 자리에서 일본 육군 현병들에게 붙잡혀 구타당한 채 연행됐고 모진 고문을 받은 뒤 상하이 파견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아 우편선 "타이요마루"에 실려 오사카 육균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를 거쳐 1932년 12월 19일 육균 작업장에서 향년 24세로 총살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독립유공자란?

일제에 항거했던 분들 중 훈장이나 표창 등을 받은 분을 뜻합니다. 그리고 "독립유공자"인 두 인물의 차이점은 먼저 독립유공자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로 나뉜다.

 

순국선열이란?

사형집행을 당하셨거나 고문으로 인해 목숨을 잃으신 분을 뜻합니다

 

애국지사란?

애국지사는 고초를 겪었지만 질병이나 노환등으로 돌아가셨거나 생존해 계신 분들을 뜻합니다.

 

그래서 유관순열사는 독립유공자 중 순국선열에 속하고 백범 김구선생님은 독립유공자 중 애국지사에 속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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